우리가 누구인가?

hessed 2012.04.29 21:24 조회 수 : 2665

Editor's Bench -"우리는 누구인가?" 중에서

-고린도전서 강해



제가 여러분께 여러 번 나누어 드린  ‘산상수훈을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아티클이 있습니다. 가지고 계신 분들은 꼭 찾아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적합한 예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화의 주인공은 자신과 안 믿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한결같이 양보하고 주며 포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너무 이상주의다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당장 이것을 실천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하고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잘 벌어서 대충 교회에 와서 헌금 좀 많이 내면 되지 하는 식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하고 정말 의에 대해 목말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예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어떤 면에서 가장 올바른 성경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우리들은 자기 이해가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크리스천이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알고 내 존재 속에 적응하면 그런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크리스천이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입니다. 종말론이라는 말은 좀 어렵지만 꼭 설명을 드려야 이해가 될 것이라서 종말론적인 말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종말론이라는 말은 성경의 세계관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역사가 진행되는 한 가운데에 딱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메시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 때로부터 세상은 종말, 마지막 때일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 전은 세상의 앞부분이고 메시아께서 오시는 그 이후는 종말의 때라고 이해했습니다. 종말이라고 하면 그냥 당장 다 끝나버리는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2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역시 종말의 때입니다. 역사의 후반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이전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백성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경우로만 따진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종말론적인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예수님보다 전에 태어났더라도 영적으로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은 분들은 종말론적인 백성인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백성을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 종말의 시대를 통치하실 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뒤의 종말의 시대는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그 때로부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천국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들은 천국이 우주의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너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헬라적인 이방인적인 사고입니다. 아주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말합니다. 종말의 시대를 다스리는 분이 오셔서 그 분의 다스리심을 선포했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거부한다면 이 세대를 살아도 종말론적인 백성이 아닙니다. 그 분의 통치권에 승복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면 종말론적인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미 우리가 들어 와 있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에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천국의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는 있지만 아직도 세상 속에서 고난도 많고 우리의 몸도 병들어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천국을 완벽하게 완성하실 때가 되면 우리가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온 피조세계에서 파괴되고 손상된 것이 다 회복되며 새롭게 지어져 참다운 샬롬이 완성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종래에 상상하던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정말 죽음도 다시는 없고 아무 고생도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너무나 잘 살게 되는 완성된 천국을 말합니다. 종말론적인 백성들로 우리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을 동안에 미래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생명의 삶의 한 부분을 맛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로 병을 고쳐주시고 배불리 먹여 주시던 것들이 다 완성된 천국에서 누릴 풍요로운 삶의 한 부분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완성된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좀 가지고 와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맛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론적인 백성으로서 몸은 아직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완성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인 백성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을 그 곳에 두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완성된 천국에서 누릴 풍성한 것에 두고 그 대신 현실의 삶 속에서는 양보하고 주고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이 없으니까 현실에서 악전고투하고 집착하고 싸워 이겨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는 완전하고 풍성하게 누릴 것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것에 연연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신자가 현실의 삶 속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잘 모르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그럴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성경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다면 그 사람의 시민권이 대단히 수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위조된 것이 아닌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탄식하는 것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이 교회가 병든 이유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달아야 한다고 해서 다 천사처럼 된다는 그런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전히 나쁜 습관도 있고 고약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최소한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뭔가 초월한 듯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고 연연해하며 매달리는 것에 같이 그런다면 과연 우리가 미래에 소망을 두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천국 시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것입니다. 왜 신자간에 이해관계로 다투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론 잘못하는 것이고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무조건 법정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고 천국의 소망이 있으니까 일부는 포기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럼 신자는 현실에서 무엇을 합니까? 신자가 현실에서 성공하여 돈도 잘 벌고 해서 교회에 돈도 지원하고 교회도 번창하고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언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아이디어입니다.


또한 현실 속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 기독교는 현실 도피주의적이냐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과거 일제시대나 6.25 같은 시대에서 순교를 당할 수 밖에 없던 때에는 교회가 다소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신자는 현실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용감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믿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 당당하게 손해를 봐도 힘 있고 용기 있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고 풍요롭고 완전한 것이 예비 되어 있고 약소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의 삶 속에 갈등이 생길 때 포기하고 양보도 할 수 있으며 내어 주기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힘이 됩니다. 가장 당당해질 수 있는 그것이 방법입니다. 용기 있고 관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싸우고 송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걸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뭐 물질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 산상복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규범입니다. 거기에 보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벗어주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 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것을, 물질이나 명예나 체면과 나의 기분과 감정과 모든 면에 있어서 내 감정을 보호하고 지키고 권위를 세우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요구할 때 다 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말의 때에 모든 풍요로움과 존귀함과 위로와 모든 것들을 다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현재적인 삶 속에서는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완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100% 너무 너무 잘 지킨다는 것은 물론 힘듭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먼저 그것이 옳은 길인 것을 알아 삶 속에서 자주 실패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잘 안 될 때는 아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 내에서 분규가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냥 두리뭉실 넘어가고 양보해 버리는 것은 뭐가 나쁘며 잘못한 것인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교회 내에서 잘잘못에 대해 그렇게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하고 불의를 행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그 순간에 잠정적인 심판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당장은 눈 앞의 이익을 취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불의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으로 심판해 놓고 있다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는 것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우리가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만일 누가 잘못했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외부까지 끌고 나가 송사를 벌인다면 그것을 벌인 나 자신도 같이 불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처음에 잘못한 사람도 불의하고 그 문제를 비화시킨 나 역시 불의해진다는 말입니다. 1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이런 불의한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 예수님과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너무나 형편없고 가증한 죄인들이었으나 성령님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므로 이제는 불의한 자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의로운 나라라는 것은 단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의롭다’나 ‘의롭지 않다’는 것은 항상 관계적입니다. 두 사람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구원자로서 아버지로서의 모든 책무를 다해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서 우리는 의로워집니다. 친구지간, 선생님과 학생사이, 상인과 고객사이의 모든 인간의 사이에는 다 관계가 있습니다.  그 관계를 형성한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하게 사랑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을 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롭다 하심을 우리는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원래 한 통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실 한 가족으로 지으셨습니다.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여러 나라 민족들이 경계를 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원래 모두 다 관계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우리의 인류애도 바로 그것입니다. 더구나 교회 속에서는 더 확실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고 한 가족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룬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대해 그것이 옳고 그르며 이익이 있고 손해가 있고를 떠나 항상 다른 사람의 유익과 복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의롭다 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광범위하게 오늘 우리들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다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우리 가정, 교회, 직장과 정치판등 많은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인간은 항상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다투고 물고 뜯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어디까지나 종말론적인 백성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완벽하고 풍성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 속에서 관대해야 됩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아니 자주 그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누구나 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그런 약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 또 묵상할 때마다 다시금 깨우치고 또 깨우치며 기억을 새롭게 하여 ‘아, 그렇구나! 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구나!’하며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삶 속에 나의 집착과 욕심을 자꾸만 버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훈련해 나가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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