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그것은 옛날에 카톨릭에서 설명했듯이 그 자체로 예수님의 살이고 예수님의 피로 그 살을 씹으면 피가 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또 너무 지나치게 반대 방향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냥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단순화시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세크라멘트, 성사라는 것은 우리 우둔한 인간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가시적인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실제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행할 때 그것은 그냥 기념식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는 그 침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교회 몸 속에 우리가 가입되는 것, 들어가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성찬과 세례에 다섯 개를 더해서 일곱 개의 성사, 세이크라멘트들을 두고, 사실 카톨릭 교회는 이 성사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하면 믿음을 너무 강조하지 않는 점입니다. 마치 성사가 요술처럼 믿음이 있든 없든 그것을 받으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처럼 주사기로 우리가 물질을 주입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되는 경우가 왕왕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례는 항상 믿음을 통해서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두 개의 성사든 일곱 개의 성사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의 세크라멘크는 영적인 실체인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인간을 도와주는 감각적인 실체,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의 영역에 있어서의 성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과 같은 것들이며, 카톨릭에는 출생과 결혼과 또 죽음에 이르렀을 때와 같은 것에 대한 성령세례와 같은 성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뿐 아니라 역시 피조세계에 속하는 교회당 밖을 나갔을 때 이 세상 속에는 성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이 세상 속에는 그러한 성례가 없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지으신 바 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시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아까 우리가 읽은 시편 19편뿐만 아니고 시편 8편과 시편 148편들도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 그분의 성품, 그분의 신실함, 이런 것들을 계속 노래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불타 버린 성터에 앉아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변함없이 지고 뜨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그 수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함이 없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계속해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모든 세상의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모든 것들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안 계신다고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분명히 계십니다. 우리가 계신다고 늘 고백해 왔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하나 하나가 세크라멘트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닐까요? 이것은 저 혼자의 공상이 아닙니다. 이것을 내츄럴 세크라멘트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도 우리에게 성례이고 설교도 사실 성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말, 인간의 설교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새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를 사도요한은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무슨 벽옥 같고, 수정 같고, 다이아몬드 같고, 황금 같고, 이렇게 인간이 쓸 수 있는 최상급의 형용사를 동원하지만 그 영광을 드러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설교도 성례입니다.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시적인 가청적인 그런 세크라멘트인 것입니다.

 

창세기 12절에 보면 성령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령께서 이 물 위에 비둘기가 새들이 자기 둥지 위를 빙빙 도는 것처럼 했다고 표현해서 성령께서 하나님은 성령이라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라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27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흙으로 만든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비로소 인간이 되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창조 역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간섭과 역사하심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개혁신학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개혁신학의 신앙고백은 이 세상에 있는 참됨과 아름다움과 선함은 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에 어떤 신상이 있었습니다.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넙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흙과 철이 섞여 있고 이런 신상이 있는데 그 신상을 큰 돌이 날아와서 두드려 부수고 오히려 그 돌이 자꾸 불어나서 온 세상이 가득하게 된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던 강대국이 다 통일 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편만하게 될 것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와 모든 나라와 사회제도가 다 무엇일까요? 그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구역 속에서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1절에 이 세상은 성령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믿습니다. 국가와 사회제도와 우리 가정과 그 중에서 악한 인간들은 성령의 뜻을 거슬리고 성령을 슬프게 하는 악한 제도를 만들거나 타락해 버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모든 세상은 성령의 간섭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학문과 지식과 예술과 우리가 하고 있는 직업적인 모든 일들이 다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재능과 달란트를 주셔서 온 세상 언어로 채우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일을 시키는 것인데 그 일을 통해서 여러분은 창조의 성령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라는 것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엇이 생기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다시금 만들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흙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흙 속에 뭐가 있습니까? 실리콘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반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반도체가 계속 계발되고 지금 말할 수 없는 큰 인류의 문명이 이루어진 모든 것들이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식이 축척되게 하고 지식이 전수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나 혼자만 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과거에 조상들의 그 은혜를 우리가 다 묶어서 온 인류가 한 개의 공동체로서 성령의 지혜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을 계발해 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문명의 또 뒤안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그 타락의 결과로 생긴 인류 문명의 오염이 오히려 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파괴할 위협까지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원래 성령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로마서 1장에 그런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리가 핑계할 수 없이 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이 분명히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동행에 귀한 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나무를 주시지 않을까요? 빵나무가 있어서 매일 빵을 따먹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대신에 밀을 주시고 심고 경작하고 탈곡하고 가루를 만들고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모든 과정에 누구를 시키십니까? 농부와 제분업자와 상인과 이런 사람과 함께 창조를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미움과 갈등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요술방망이로 땅 때려서 한꺼번에 회개하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품은 사람이 가서 사랑과 안내로 설득하고 화해를 시켜서 그 곳을 평화의 장소로 만들도록 사랑의 성령의 창조에 동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일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초월적인 은혜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약사들에게 은혜의 의학의 지혜를 주시고 그 종들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불행한 것은 그 사람들 자신이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자신은 결국 저주 받을 뿐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술 미술과 음악과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 그러한 뛰어난 아름다운 심미적인 작품을 보았을 때 가슴이 벅차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있으시죠? 그랬을 때 여러분, 그 감정에 그 느낌의 정체가 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저는 그것이 뭘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나중에 제가 깨닫게 된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성가나 종교음악에서 뿐만 아니고 일상에 많은 음악들 속에서 성령의 아름다움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중세기 영창 같은 것을 들으면서도 영감을 받지만 모차르트의 매직 플르트 마적 같은데 나오는 그런 테너와 베이스 아리아를 들으면서도 깊은 영감을 받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간섭이시고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클락 피낙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황혼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목격한 자는 창조의 성령을 경험한 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개념에 익숙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들은 의외로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잘 모릅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과장법을 사용했든지 또는 지나치게 문학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그 솜씨와 하나님의 인격을 찬양했습니다.

 

20세기에 살다 죽은 정말 뛰어난 유대인의 랍비 중에 에브라함 조쉬아 헷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아주 한 동안 이 사람의 저작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유대인의 랍비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유대교와 카톨릭과 개신교를 다 아울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위대한 랍비였습니다. 이 사람이 죽을 때 ‘당신이 일생 동안 하나님께 가장 감사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프트 오브 원더(Gift of Wonder)를 주신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경이로워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의 기도문 중에 이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영어로 된 것인데 제가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 하나님 나에게 놀라움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나를 놀라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우주의 구석구석에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의 메시야께서 수만 곳의 장소에서 또 수많은 사람들의 몸짓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당신의 메시야가 일하고 계심을 보게 하소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놀라운 것들이 내 맘을 사로잡게 하소서. 나는 그 모든 것의 원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보고 놀라며 경탄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이것이 너무나 부족한 점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고 아이들의 해맑은 눈동자에서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이렇게 먹을 때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때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911대원들의 활동을 TV를 통해 보면 정말 강아지 한 마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땅을 파고 동굴을 뒤지곤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강아지 한 마리에 매달리는 대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루는 집에 있는데 저의 아내가 ‘여보 여기 좀 빨리 와 봐요. 허밍버드가 와 있어요’ 하길래 귀찮아 하면서 가보았더니, 정말 humming bird 가 한 마리 와 있더군요. 허밍버드는 얼핏 보기에는 꼭 벌과 같습니다. 아주 작은 새인데 아주 빠른 속도로 고깔처럼 생긴 꽃 속에서 아주 빠르게 꿀을 빨아 먹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 아내는 그냥 신이 나서 난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벌 같이 생겼는데 왜 그래’라고 이야기 한 전 참 삭막한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집에 밤마다 너구리가 여러 마리 내려오는데 정말 예쁩니다. 요놈들이 주둥이가 새까맣게 생겨서 조로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데 새까맣고 꼬리가 달린데 까만 줄이 쳐져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어제는 밖에 와서 밥 달라고 우리 창문에 매달려서.망창이 다 찢어졌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너무 신기해하고 기뻐하는 그런 것들까지도 다 성령께서 내 속에 충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할 때나 포근히 껴안아 줄 때 얼마나 좋습니까? 안아 줄 때 참 좋죠? 사람을 만날 때 친구들과 깊은 우정 속에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삶의 재미를 느끼는 이유가 뭡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때로는 부패와 사회악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하고 분노합니다. 왜일까요? 성령께서 그 속에서 슬퍼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쁨과 슬픔과 소망과 절망과 고통과 갈등 모든 것에서 우리는 성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면, ‘Eyes Wide Open’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성령의 역사가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클락 피낙이란 사람이 표현하기를 삼위 하나님께서 그토록 도저히 셋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하나로 뭉쳐계시는 것은 바로 성령이 사랑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성도 하나님의 성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한 면일 뿐만 아니라 세분 하나님이 가지신 절대적인 사랑의 공개 속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있는 곳에는 항상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은 세상 구석구석 속에 존재하고 역사해서 생명이 없는 곳에는 생명을 심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무의미함 속에서 의미를 주며, 또 추한 곳에 아름다움을 갖다 주고 갈등 속에서 평화를 창조하는 그런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며 그러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곳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이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거미의 아름다운 무늬에서부터 은하계의 광대함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 전체에 걸쳐 놓은 것처럼 은하수가 지나갑니다. 그 은하계가 천억 개 정도가 모이면 전 우주가 된다고 합니다. 태양계 지구 태양과 그 아홉 개의 행성을 다 합친 것을 태양계라고 하는데 그 태양계가 천억 개가 모이면 은하계가 되고 은하계가 한 천억 개 정도가 있으면 우주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얼마나 크고 광대하신 일을 하고 계신가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래야 된다고 표현한 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경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 하셨을 때 물론 그것은 어린 아이가 가진 절대적인 의존성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의 지협적인 뜻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겐 모든 만물이 새롭습니다. 그냥 기어 다니면서 온갖 것을 입에 넣어보고 그냥 빨고 '저게 왜 저럴까?' 하며 사실은 모든 것이 아이들에겐 새롭고 신선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굉장히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 중에 니코스카잔차스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제가 그 소설이 너무 좋아서 DVD까지 보여주고 최근에는 마지막에 그 조르바와 영국 소설가가 추는 춤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언제 제가 한 전 여러분 앞에 춰 보고 싶군요. 너무나 자유인인 조르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이걸 좀 보세요. 어떻게 이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포도주의 아름다운 빛깔과 향취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구름과 태양빛과 꿀과 음악의 달콤함에서 사람들끼리 포옹과 땀 흘리는 일과 느긋한 휴식 속에서 즐거운 오락과 취미생활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가 내츄럴 세크러멘트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할 때 좀 답답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감사해야 되겠는데 그러기가 너무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머리로만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성령의 창조의 동행에 대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됩니까? 우리 삶을 부요하게 만들어 줍니다.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우리가 너무나 크게 나쁜 영향을 받은 이원론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한 것입니다. 중세기를 지나오면서 기독교에서는 거룩함과 속된 영역을 너무 구분해 버렸습니다. 교회와 종교에 관해서는 거룩한 것이고 나머지는 속된 것이며 우리는 세상에서 마지못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억지로 일해야 되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다가 주일날 교회 쫓아 들어와서 그냥 하나님께 위로 받고 하는 등의 생활과 우리의 생각들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까 우리가 읽은 시편 19편처럼 온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누리면서 또 다시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창조를 동행하면서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잘 안 될까요?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에 이러한 많은 가르침을 새롭게 보면서 ‘이걸 왜 우리가 모르고 살았을까?’ 하고 의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진리들은 오래 전에 많은 경건한 분들이 이미  발견한 사실들입니다.

 

6세기, 7세기 아일랜드에 있던 켈틱족의 신자들은 그렇게 표현한 바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가 밖에 쫓아나가서 개울물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를 때 마치 곰들이 연어를 낚아 채듯이 ‘탁’ 하고 잡는 것을 보며 캘틱 수사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고양이의 입에 임했다‘고 선포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 그것이 우리가 바로 성령의 창조에 동행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안목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왜 이렇게 기독교인의 삶은 좀 메마를까?’ 너무 무료하고 너무 표면적입니다. 물론 우리가 십자가의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눈물이 있고 감격과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계속 됩니까? 계속 이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너무나 메마릅니다. 너무나 무미하고 색깔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만 종교적인 감흥을 자꾸만 리바이벌 해 보려고 계속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안 되니까 부흥회에 있는 대로 쫓아가서 머리 디밀고 안수 받고 해 봐도 저처럼 이렇게 머리만 빠지지 별로 그렇게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의 동행뿐만 아니고 창조의 동행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안 될까요? ? 이것을 우리가 몰랐기 때문이고 우리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이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주보를 보셨습니까? 뭐라고 써 놓았죠? ‘다시 생각해 보는 QT’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LA에 가서 QT강의를 좀 해 달라고 부탁 받았을 때 이런 이야기를 좀 드렸습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Quiet Time이 필요합니다. 조용한 시간 다른 바쁜 일상에 방해 받지 않고 주변 상황에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있어야만 하나님 말씀을 묵상 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소중하고 다 중요합니다.

 

전 한 20년 정도 QT교사를 했습니다. 20년 정도를 QT와 접해 왔고 지금은 별로 안 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한국과 미주지역에서 큐티를 널리 보급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는 것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잘 안 합니다. 그렇죠? 수백 권 우리가 매일성경 갖다 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꽤 많지만 매일 하는 사람이 드물고 한다 해도 아주 풍성하게 잘 안 되는 것을 제가 느낍니다. 저는 100군데 이상의 교회에 QT를 보급했고 또 자주 가서 Follow Up도 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1년 쯤 뒤에 가 보면 예전에 앞으로 QT를 열심히 하겠다고 일어섰던 사람들 중에 거의 5% 미만들의 사람들만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는 것도 뭐 그렇게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선교단체에 있을 때는 거의 강압적으로 QT를 강조했습니다. 제가 학교에 대학에 있을 때는 학생들 교실에 찾아가서 불러내서 QT노트를 검사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내가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제가 깨닫는 것이 이것입니다. ‘, 이게 꼭 같은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런 하나님과 사귀고 하는 동행하는 방법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제가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그렇게 많지만 확대경으로 보면 다 그 모양이 틀린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다 다르게 지었습니다. 여러분 중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가 있다고 해도 모든 여자들이 그녀와 같으면 예쁘겠어요? 장미꽃이 예쁘지만 모든 꽃이 다 장미면 예쁘겠습니까? 여기서 다양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다양하게 지으셨는데 우리는 너무나 획일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의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묵상이 안 될까?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못 깨달을까?” 하고 계속 제가 막 다그치곤 했을 때에도 잘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새 많이 깨닫는 것은 QT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QT가 꼭 우리가 매일성경을 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내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묻고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해야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을 통한 계시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심입니다. 그것이 핵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성이라는 인식기능이 가장 중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번 예배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예를 잠깐 든 적이 있지만 다시 가장 극단적인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개신교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신교는 어거스틴 이후로 연결되어온 인식론적인 모델이 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보고 깨닫고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하는 것이 주를 이룹니다. 루터, 스빙글래, 캘빈,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분들이 누구입니까? 모두 학자들입니다. 학자, 교수였습니다. 학자이다 보니 합리적인 담화라든지 철학적 사색과 학문적인 엄밀성과 같은 양식으로 말씀을 많이 접근했습니다. 그것이 주로 서방교회 웨스턴 처치에 모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익숙지 않은 교회가 있습니다. 동방교회 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정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저의 헬라어 교수가 이 러한 Greek Orthodox Church의 사제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통해서 이러한 신학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배도 참석해 봤습니다. 특징은 우선 향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향연이 자욱하고 거기에 보면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성상들이 있고 그 다음에 성찬과 그것을 끊임없이 십자가와 성상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그 독특한 그리스정교의 그 영창이 아카펠라가 아주 아름답게 들리는 그것을 통해서 시각은 아이콘 아름다운 성상을 보고 후각은 기도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성도의 향연은 성도의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향연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경험하고 귀로는 아카펠라를 듣고 미각은 성찬을 먹고 마시며 촉각으로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이러한 모든 오각을 통한 하나님께 나아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서방교회들이 많이 도전을 했습니다. 너무 애매모호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슬라브 민족들은 그런 심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정교회로 들어갔고 많은 서방교회 있는 서방세계 사람들은 인식을 통해서 서방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 쪽이 다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이것이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우리가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배타하기 때문에 문제이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귀한 세크라멘트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구체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매일성경 같은 교재를 중심으로 큐티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식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에 말씀을 터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시는 인식 말씀을 통한 지적인 인식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감성을 통해서 들어감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겐 감성이 발달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인식기능이 이 모양이냐고 자꾸 다그쳤던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알고 보니 훨씬 더 감성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매일성경에 지금까지 배운 대로 그렇게 하시되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은 매일 시간을 내서 책을 읽으십시오. 좋은 책들, 설교집도 좋고 때로는 경건서적 좋은 것들을 한 몇 장씩 읽으십시오. 저는 옛날에 한동안은 이중수 목사님의 하나님의 무지개를 가지고 QT를 했습니다. 매일 그냥 한 장씩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묵상하곤 했습니다.

 

그 동안 QT는 선교단체를 통해서 한국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납법적 성경연구법이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따라 가지 말고 혼자 생각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혼자서 끙끙 대면서 묵상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설교나 강해를 읽으면서 QT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집어 들고 읽어라 하는 그런 음성을 듣고 문득 성경을 펴 보니까 로마서 13장이 나와서 그것을 읽고 회심했고, 요한 웨슬레는 어느 날 예배에 참석했다가 어떤 사람이 마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지각이 둔하고 아직 타락한 본성이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각능력으로는 그냥 이렇게 살아갈 때 하루 바쁜 생활 중에 항상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의 동해뿐만 아니라 창조의 동행을 하기 위해서 모든 다른 방해물이 사라진 내 나름대로의 조용한 시간 Quiet Time이 필요합니다. 이것만큼은 스스로 시간을 내야 됩니다. 이것만큼은 꼭 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의 동행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시몬 베이유라는 일찍이 요절한 프랑스의 작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목을 집중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이목을 집중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아까 제가 많은 예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 세상의 많은 사건들과 모양들 속에서 왜 성령의 기를 못 느낄까요? 거기에 집중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성령의 역사라는 진리 하에서 그것을 바라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구름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울창한 수목을 곰곰이 진리에 비추어서 바라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은 그것을 느끼고 누릴 수 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끼고 그 속에서 성령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 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은 너무나 가난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너무 색깔이 없습니다. 물론 이 지상생애에서 모든 것이 완전한 형태로 주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Quiet Time을 이제는 조금 더 풍요롭게 자연스럽게 다양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종래의 방법대로 해도 좋고 또 강해 집이나 좋은 경건서적을 정기적으로 조금씩 읽어도 좋고 때로는 기도문으로 해도 됩니다. 요새 제가 주로 쓰는 방법을 소개하자면 저는 캘틱 수사들이 쓴 기도문으로 QT를 합니다. 일주일 월, , , , , 토로 되어 있고 하루에 네 번 아침 낮 오후 밤 네 번 기도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냥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을 저는 그대로 읽어요. 읽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교회 정통성이 깃들어 있는 좋은 기도문들은 너무나 좋습니다. 정말 그 속에는 그 사람들의 깊은 삶의 체험과 고뇌와 신앙의 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액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기도문을 빌어서 기도하고 QT하는 것은 굉장히 훌륭하고 탁월한 방법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도문들을 많이 소개하려고 합니다. 너무 자료가 많아서 제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묶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기도문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한 QT를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이 어떻게 나는 눈으로 보는 것은 딱 질색이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귀를 쓰십시오. 찬양을 많이 들으시라는 것입니다. 찬양. 찬양의 가사 자체가 시이고 고백입니다.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많이 들으십시오. 그래서 찬양을 틀어놓고 들으면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께 나아갑니다.’라고 해도 됩니다. 또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연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성경을 읽어도 됩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제가 오늘 말씀드린 이 진리를 마음속에 품고 좀 더 활짝 열린 눈으로 이 구속과 창조의 동행을 성령과 더불어 하면서 성령을 인식하고 성령을 느끼고 그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시간을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루에 301시간 그 시간을 써도 다른 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뭐, 학위 못 받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이 직업생활에 게을러서 밥 굶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시간을 과감하게 뚝 잘라서 내십시오. 그것이 아침이든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린 방법대로 사용하십시오. 매일성경을 사용하시든 좋은 책을 사용하시든 음악을 들으면서 사용하시든 기도문을 사용하시든 반드시 시간과 여유를 내서 십자가의 빛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피조세계와 역사와 인간세상과 내 가정과 내 주변에 이른 사소한 일들과 사건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감사하고 정말 너무 너무나 행복해 하는 그런 삶을 회복해야 됩니다. 그러한 창조의 동행을 경험해야만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에 와서 구속의 동행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할 때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우리 눈에 덮여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가 주일날 와서 그냥 예배 한 번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을 회복하려고 하니까 많은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한 때 자연의 아름다움을 크게 경탄하는 그런 신학과 풍조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어떻게 됐는가 하면 자연에게도 파괴적인 면도 있더라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자연 숭배가 무너졌습니다. 자연을 숭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연과 이 세상의 역사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리 주변의 것들은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간섭을 받는 성령이 만지시고 이끌어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들이기 때문에 세크라멘트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이신 성령님을 만나려고 해야 되고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풍성해 집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꼭 시간을 내셔야 합니다. Quiet Time을 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