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설교 - 관용 Generosity

hessed 2011.05.12 20:54 조회 수 : 4681

관용  Generosity  

빌립보서 4장 4-5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중국계 미국인 2세로 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한 후 현재 예일대학 법대에서 가르치고 있는 에이미 추아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제국의 미래(Day of Empire)'라는 책은 아마존사이트에 소개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은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적인 초강대국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들이 절대적인 초강대국의 우위에 오르기까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같이 매우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였다는 주제입니다. 모든 초강대국들이 다른 민족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는 관용성은 그들이 패권을 장악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한 그런 강대국들이 쇠퇴해져갈 때는 어김없이 외국인에 대한 불관용과 혐오,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박대함으로써 제국은 쇠퇴해갔다고 분석했습니다. 또한 에이미 추아는 세계적 패권 국가가 생기기 위해서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 나라의 권력이 동시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모든 권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둘째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는 그 나라가 특정한 지방이나 지역의 우위성을 넘어서 지구상의 방대한 지역의 인구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나라가 광대한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무엇보다 폭넓고 세계적인 인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지성, 신체적인 강함, 기술, 지식, 독창성, 연결망, 혁신적인 것이나 발명 등의 모든 것들이 한 장소나 인종, 또는 한 종교집단 내에서 다 발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가 세계적인 자원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과 종교의 배경을 따지지 말고 인재를 불러들여서 그들이 살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라든지 로마, 대몽골제국, 당나라, 대영제국, 근세 미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속의 초강대국들이 해 온 일이 바로 다른 민족에 대한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여기서 관용이라고 말한 것은 인권 자체를 폭넓게 존중하는 의미에서의 관용이라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적 차원의 문제로 다른 민족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언어적인 많은 개인이나 집단들이 한 사회 안에 참여하고 공존해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자유를 관용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6세기 경에 페르시아의 초대왕이었던 고레스 왕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역대하 36장 이후나 에스라 1장 1절 이하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이스라엘 민족들인 포로들을 옛 땅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을 다시 중건하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성전에서 빼앗았던 여러 가지 귀금속으로 만든 기물들을 돌려주고 심지어는 성전의 건축비도 부담해주는 기이한 일을 한 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보통 한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통치자를 통치권좌에서는 내려오게 하지만 목숨을 빼앗지 않고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워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총독의 통치 아래의 백성들이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의 삶의 방식을 간섭하지 않고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뿐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의 언어들, 엘람어, 바르메니아어, 이집트어, 그리스어등 많은 언어들이 공용으로 사용되게 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정복지의 피정복민족들을 행정의 고위직에 등용해서 높이 출세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놀라우리만큼 종교적인 관용을 베풀어서 피정복민들의 사원과 종교의식들을 보존해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레스왕의 뒤를 이은 다리오왕이나 크세르크세스왕들의 시대에는 이러한 관용정책 때문에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나라들이 다 통합이 되어 그 나라의 수도에는 모든 나라의 문명이 들어와 안착되어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얼마나 컸던지 페르시아의 수도를 ‘타이리다세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는 ‘타라데이소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파라다이스'의 어원입니다. 천국, 낙원을 가리키는 파라다이스의 어원이 그 곳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만큼 완벽에 다다를 만큼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이루었던 것은 페르시아제국이 가지고 있던 대단한 관용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영토의 넓이에서는 조금 못 미쳤지만 거의 다른 모든 면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초강대국을 다 능가하는 로마를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로마가 정복한 모든 나라들은 기꺼이 로마에 동화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 안에 있는 도로의 총 연장이 8만 5천 킬로미터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는 6천만 정도였습니다. 당시 세계 인구가 2억 정도였음을 보면 굉장히 많은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군사력뿐만 아니라 과학, 문학과 예술의 수준은 그 이후 천년이 넘도록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국가가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모든 야만인들을 모두 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주고 그들의 재능을 키워주어 제국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정복민들의 지도 계층을 멸시하지 않고 로마의 권력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었습니다.

 

 

에이미 추아 교수뿐만 아니라 ‘로마인 이야기’라는 장대한 소설을 쓴 시오노나나미라는 일본 작가가 있습니다. 장장 16권짜리 책으로 이 작가는 일본에서 초급대학을 졸업한 뒤에 로마로 건너가 약 30년 동안 독학으로 로마사 연구를 한 분인데 세계적인 굴지의 로마사 연구가로 뽑히는 분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도 말하기를 로마가 그렇게 융성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로마의 관용 정책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즉석에서 항복하는 적군의 장교들을 로마군의 상응하는 계급의 장교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제국 전역에서 각 민족들의 신을 인정하고 종교적 다원성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전성기를 지나서 쇠퇴하기 시작할 때 로마 안에서는 아주 극단적인 불관용 정책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북쪽 경계면에 이미 이민을 와 있던 게르만족을 많이 박대하고 그들에게 심한 불평등 정책을 씀으로써 게르만족들의 반란과 대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에이미 추아교수는 계속해서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점유하고 있던 초강대국인 몽골제국을 예로 듭니다. 영토의 넓이로만 따지면 몽골이 가장 넓게 정복한 나라였습니다. 우리에게 몽골민족은 무척 미개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도 몽골민족은 정복한 나라의 화려한 궁전 안에 다시 천막을 치고 게우르라는 자신들의 독특한 주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문화도 없이 매우 미개해 보이는 민족이었지만 놀랍게도 징기스칸은 정복하는 모든 나라들의 다원성을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물론 전쟁시에는 굉장히 잔인했지만 정복을 하고 난 후에는 그 나라의 모든 귀족들에게 상응하는 신분을 보장해주고 그 문화와 종교들을 기꺼이 흡수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문화가 있으면 징기스칸 스스로가 그 사람들을 비서로 등용해서 늘 배우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마녀사냥을 하고 이단들을 말뚝을 박아 죽이거나 불에 태워 죽이는 시절에 징기스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며 피정복민들 중의 유능한 사람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탁월한 관용정책을 폈습니다.

 

 

근세에 와서 초강대국을 꿈꾸던 나라들 중에 독일과 일본이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자기 나라를 제외한 전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제국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극단적인 불관용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독한 자신들만의 인종적 순수성과 우수성만을 주장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러했고 독일 사람들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극단적으로 신봉했습니다. 독일민족은 헤리안레센, 자신들이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주인, 왕이 되는 민족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을 극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유태인학살입니다. 대단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관용성 때문에 세계제국의 꿈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역사속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당나라도 그렇고 팍스아메리카를 이끈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부 다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관용과 다원성을 인정해줌으로써 대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관용이 바닥을 드러내고 불관용과 차별이 짙어졌을 때 제국내에는 많은 반란들이 일어나고 결국 망하게 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는 것이 에이미 추아교수의 지적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광범위하게 학자들로부터 동의를 얻고 칭찬을 받게 된 학설입니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2세 중국인으로 미국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역사적인 안목으로 미국을 헤집어 보면서 1,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유럽과 중남미의 많은 이민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땀과 수고에 대해서 걸맞는 보상을 해주는 관용정책을 펼침으로써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을 아주 자세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근래에 들어서서 이민자 문제라든지 환경의 문제, 후진국과의 무역에 있어서의 불평등한 압력, 중동정책, 특히 실패한 이라크 침공 등의 문제에서 강력한 불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강대한 제국으로서 아직도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제국의 미래’라는 책입니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매우 독특한 나라입니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단일 민족과 단일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외국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단일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외세의 침탈과 역사적 고난을 짚고 일어서서 세계 12권의 경제대국을 일구어낸 나라이자 민족입니다. 물론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한민족 특유의 인내심과 부지런함과 공동체의식이 큰 몫을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애국가 가사를 잘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를 부를 때는 부처를 믿는 사람도 무당도 스님도 한 목소리로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단일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이 다른 경계선을 뛰어 넘는다고 할 만큼 우리들은 이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더 이상 한 민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숨어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철의 장막 너머에 있던 철현도 무너지고 중국도 이제 장막을 걷고 세계민의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이제 그 나라가 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편협한 민족주의는 민족이 더 잘 사는 길이 아니라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배워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때 늦은 민족주의가 발흥을 해서 거꾸로 가는 모습입니다. 매우 편협하게 외국인에 대해 대단한 불관용 정책을 갖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장황하게 거론한 세계사 속에서 제국들의 관용정책을 이야기한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있어서 크게 아쉬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관용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민족이 아닌 외국인에 대한 불관용, 또한 한 핏줄이지만 너무나 먼 나라가 되어버린 북한민족에 대한 불관용, 그리고 한 사회 속에 살면서도 사상과 이념이 다르거나 사회 경제 계층이 다른 이웃들에 대한 불관용의 세 가지 사실들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오는 시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4,5

오늘 본문의 앞 구절들도 이해를 위해 다시 읽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1-3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퍽 칭찬해 마지않는 교회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교회이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썼을 때를 보면 굉장한 애정과 기대감을 가지고 편지를 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점을 가진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들 사이에 어떠한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하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고 너희의 관용을 베풀라고 한 것을 볼 때 교회 내의 모종의 불관용, 서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관용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굉장히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관용에는 ‘합리적’이거나 ‘점잖다’, 또는 ‘적당하다’, ‘공정하다’, ‘알맞다’, ‘온유하다’, ‘순종하다’는 등등의 부드럽고 긍정적인 뜻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딱히 감을 잡기가 힘든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generosity' 나 'tolerance'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쉬운 예를 한 번 들어보려고 합니다. 어떤 선생님이 두 학생의 시험성적을 매기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은 80점, 다른 학생은 50점을 각기 받았습니다. 80점을 받은 학생은 굉장히 부유한 가정의 매우 좋은 환경에서 과외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조건하에서 80점을 받았습니다. 반면 50점을 받은 학생은 고학생으로 공부할 시간도 무척 부족하고 단칸방에 여러 사람이 사는 어려운 가정에서 공부할만한 여건이 잘 마련되지 않은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학생이 50점을 받았을 때 그 교사는 더 열등한 학생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은 80점을 받은 학생에 못지않은 학생인 것입니다. 원리적, 규범적으로는 50점을 받았지만 80점 이상으로 평가를 해 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용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의미입니다.

 

며칠 전에 354일 만에 용산 참사가 극적인 타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화염병을 가지고 시위를 하던 시위대와 그것을 강력하게 진압하던 경찰 사이의 다툼이 벌어져서 경찰 1명과 시민 7명이 숨진 사건입니다. 그 가족들은 시신들을 장례도 지내지 않고 인질로 붙잡아두며 계속해서 재개발 당국과 서울시와 밀고 당기는 어려운 시간을 1년 남짓 보냈습니다. 이제 재개발 당국과 서울시에서 시민 1명당 장례비와 위로비로 7억을 주기로 합의하면서 아직 마무리 할 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단 타결을 본 셈입니다. 이에 대해서 매우 말들이 많습니다. 한 쪽에서는 아무리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법치국가에서 법을 어기고 살인적인 무기로 폭력적인 시위를 한 사람들에게 그런 거액의 보상을 해 주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또 한 편에서는 그런 보상만으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며 시위진압의 책임자를 색출해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양면적인 입장을 볼 때 저는 물론 불법적인 시위였지만 피해자들의 아픔을 감안해서 큰 보상을 해 주도록 한 것이 관용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피해를 본 사람들은 더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지 말고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관용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안에는 참 관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한국 민족이 다른 좋은 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팍팍하고 관용이라는 면에서는 매우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특히 좌파나 우파 사이의 불관용이라든지 진보와 보수 사이의 불관용, 늙은이와 젊은이들 사이의 불관용,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불관용,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불관용은 너무나 안타깝게 합니다. 많은 것이 서로 다르지만 최소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마음이 너무나 아쉬운 때입니다.

 

인터넷에서 아고라나 여러 토론의 장이 열리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십시오. 사회적인 선포와 선언에 대해서 너무나 이념과 사상이 다른 상대에 대해서 혹은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야비하고 험악하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난무하는지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만인이 만인의 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해하지 못해서 난리입니다. 아주 조그만 차이점도 관용하지 못하고 으르렁 댑니다.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칼질을 해대고 독설과 저주로 대항을 합니다. 우리 사회는 통합이라든지 소통이라든지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와 같은 것들이 실종된 사회임은 물론이고 법과 원칙의 그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해당되는 관용이 너무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외국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 얼마나 야비하게 굴었는가를 저는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일을 하면서 차별대우와 박대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외국인들은 더 신경을 써 주어야 됩니다.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50만명 정도의 외국인들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척 강퍅하게 대하고 멸시하거나 천대합니다. 고용주들은 그들에게 형편없는 임금을 주고 그나마도 자주 내쫓아 어려운 사각지대로 내몰아 버립니다. 그들이 몸을 다치거나 할 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채 내쫓을 뿐만 아니라 항의를 하면 법무부에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만큼 불법 체류자가 많기도 한 현실입니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머물다가 합법적인 신분을 얻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외국인들의 노동력을 수탈하고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사회적 관용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외국인과 나그네에 대해서 굉장한 관용을 베풀 것을 하나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대열에서 12위의 경제대국이고 국민총생산이라든지 개인의 소득면에서 정말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외국인들에 대한 이런 관용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것들이 다 헛되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국가적 배려나 국민들의 관용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복을 더 이상 받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말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북한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북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생각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에 못지않습니다. 대국 민간단체에 속한 인도주의적인 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북한 동포들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은 싸늘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북한 국민이 아니라 김정일을 비롯한 위정자들에 대한 경계와 반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북한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관용이라는 덕목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과의 관계를 정치적이나 외교적인 관계로 처리하는 것은 위정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 국민들은 마음속에서부터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한없이 멀어져 버린 북한 동포들에 대해서 관용의 마음을 갖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가는 통일은 반드시 됩니다. 그런데 남북한 국민들의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관용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적인, 지형학적인 통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갈등이 더 많아지고 남북한 국민들이 더 불행한 삶을 살 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정치, 사회와 국제관계 등의 세상의 모든 부분에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관용은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만 시작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원칙대로 했다면 우리들은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타락성과 부족함을 충분히 감안해주시고 그에 더해서 죄인까지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그 관용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확증해주셨다고 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관용입니다. 원칙적으로, 법적으로 말한다면 당장 내쫓거나 처벌을 해야 마땅할 아들을 받아 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상속자로 크게 환대해주는 관용, 이것은 이기적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하나님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상태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용을 베풀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셨고 기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은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빌립보 2장 그리스도의 찬송시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사 종의 신분까지 낮아지시고 십자가에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 '품으라'는 것은 도덕적인 훈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것을 가능케 이미 해 주신 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온유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땅히 주장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온유라 하고 자기 자신의 장점을 잊어버리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의 잘남을 잊어버리는 온유와 겸손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심과 그 분의 존재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분이 얼마나 많은 권리를 포기하셨고 그 분이 얼마나 많은 장점들을 스스로 가렸는지를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의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이하면서 이런 설교를 하게 된 동기는 바로 우리 공동체를 위한 바램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자그마한 교회에 다니면서 얼마나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얼마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관용하고 있습니까? 그냥 우리는 우리와 비슷하고 내게 편한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철저히 문 밖에 세워두고 관용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가장 많은 이유가 '다름'입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무언가가 통하고 느낌이 전달되는 것 같고 코드가 맞는다고 여겨지면 쉽게 친해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뭔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혐오와 두려움을 갖습니다. 창세기 4장 14절 이하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추방을 당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 벌이 내게 너무 큽니다. 내가 방황하며 돌아다닐 때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낯섬에 대한, 다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일단 거북합니다. 나와 사회적, 경제적인 수준이나 학력이 너무 다른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무슨 도움이라도 주어야 할 지 모르는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성격이 너무 다른 사람, 기질이 너무 다른 사람 등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본능적인 불쾌감과 거부감과 혐오감을 갖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해결해야 될 문제입니다.

 

교회 내에서 친한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 범주를 넘어서면 도저히 교회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울 만큼 우리는 불관용적입니다. 저는 한 달여 전부터 관용의 주제를 마음에 품고 꼭 한 해를 보내기 전에 나누리라고 생각하다가 '제국의 미래'라는 책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 많은 동감을 하며 거대한 제국뿐만 아니라 일대일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관용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덕목을 떠나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그리스도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될 덕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용이 깨어진 이 세상 속에서 관용을 실천하고 전파해야 될 사람들로서 부끄러울 만큼 서로에게 관용적이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계획할 때 뼈저리게 느끼고 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관용하셨습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주셨는가를 얼마나 자격 없고 무례하며 배은망덕한 우리들을 관용하셨는가를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열어주어야 됩니다.

 

또 한 가지 주신 선물은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서 너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선물로서 주신 기쁨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할 수 있음은 무언가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쁨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무엇이 떠오릅니까? 여러 가지의 기쁨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기쁨은 잔치의 기쁨입니다. 결혼잔치와 같은 잔치 때는 거지도 환영 받습니다. 웬만한 원수라 하여도 잔치 때에는 마음이 열려지고 상통하여 문을 열어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잔치를 기쁨으로 주시고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조금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기쁨이라는 것을 감정적인 요소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뻐하라'고 명령형으로 들으니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행동으로 즉각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 느낌을 강요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뻐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인 선물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쁨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고 합니다. 행복은 조건적입니다. 행복하려면 조건이 필요합니다.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다행스럽고 복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찰리 브라운 만화에 보면 '행복은 부드러운 강아지'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강아지가 없어지면 행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쁨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초월적인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내 삶의 조건과 여건으로는 하등 기쁠 만한 일이 없을 때에도 기쁨은 우리 안에 충만할 수 있습니다.

 

기쁠 때 사람들은 관용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기쁨이 없으면 관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선물인 기쁨을 우리에게 누리라고 하실 때 우리는 이미 받은 것으로 알고 누려야 합니다. '네'하고 응답하고 순종하면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의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을 누리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은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선물로서 순종으로 기쁨을 누릴 때 우리들은 비로소 관용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관용할 수가 있습니다.

 

관용은 그 단어의 의미대로 내 울타리를 열고 내 원칙과 가치관과 기준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내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확장됩니다. 내가 넓어집니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일까요? 내가 크는 것입니다. 내가 성숙해지는 것, 내 자아가 확장되는 것이 인생 최대의 기쁨이고 그것은 잘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관용하라, 너희 관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은 종교적인 의무나 교훈이라기보다 축복의 선언입니다. 관용함으로써 우리들은 내적 자아가 확장되고 굉장히 깊어집니다. 그 삶 자체가 조건 없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늘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관용을 베품이 가능하다는 말도 되고 또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관용이 가능하다는 뜻도 됩니다. 만일 내일 당장 예수님이 오신다면 오늘쯤에는 우리들 모두는 굉장히 관용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관용적인 척이라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 않을까요? 정말 주님께서 가까우심을 내다보는 사람이라면 왜 관용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잔치가 곧 열릴 텐데 왜 관용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성찬을 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눕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우리 모든 죄 많은 인류를 자기 몸속으로 받아 들여 주셨고 또 관용해 주셨습니다. 그 피와 살에 동참하는 우리들은 즉시 우리를 개방하여 내 자신을 열고 이제 관용해야 합니다. 이것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이제부터는, 올해부터는 관용적인 삶을 살겠다,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할 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가 관용적인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도록 늘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찬을 먹고 마실 때에 이를 위해 기도를 드리십시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만큼 불관용적이고 폐쇄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제가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시면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자아를 확장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 내가 체질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관용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드리며 성찬을 먹고 마실 때 그 떡과 포도주의 배후에 계시는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께 들어가시고 또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내내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관용적인 사람들이 되어가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조국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2.8% 밖에 안 되는 소금이 온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비록 소수의 무리일지라도 관용할 수 있는 교회로 말미암아 조국사회가 변화되고 우리가 대북정책에 있어서나 외국인들에 대해서나 정말 본이 될 수 있는 교인들의 삶이 되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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