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분의 동정녀 탄생과 죄없으신 완전한 인성,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몸의 부활 그리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현재적 통치를  믿는다.
성경말씀: 로마서1:1-6

들어가는

이조시대의 성종 임금은 백성들의 삶의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서 간혹 밤중에 평복차림으로 경호원 사람만 데리고 민가를 둘러보곤 했습니다. 어떨 때는 가난한 효자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끼니를 때우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고는 다음 쌀가마를 보내 주기도 했고 해씩 과거에 떨어진 효성이 지극하고 청빈한 선비에게 급제의 기회를 터주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받은 백성들은 그들이 받은 도움도 도움이지만 무엇보다 억조 창생을 호령하는 지존이신 임금께서 친히 자신의 집을 찾아주었다는 것에 몸둘 바를 모르며 감격해했습니다.

 

지체가 높거나 유명한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신분이나 모습을 취하여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감격해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아르바이트를 하던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판사부인들의 모임에서 서울구경을 당시 박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악수를 하고 와서는 며칠씩 악수한 손을 씻지 않았노라고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양반상놈 같은 신분의 차이가 없다 보니 그런 일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 사이의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란 것은 바람직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악된 인간의 모순된 제도의 소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로도 그려낼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지어졌고 그분의 고임을 받는 귀한 존재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혜의 차원의 얘기지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영광스러움과 크심에 비하면 광대한 우주에 있는 개의 별에 지나지 않을 만큼 보잘것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사랑하시되 얼마나 말도 안될 만큼 끔찍히 사랑하시는 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감읍해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정말이지 사람들이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아는 세상입니다. 불신하는 세상임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와 신자들도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열정과 경외심 보다는 하나님이 내게 해주셨는가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삶의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정점은 언제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주변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위성들처럼 태양을 바라보며 회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고찰은 진실로 소중한 교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성 교리
(
교리신조 다시 반복)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교리는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사고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통해 양성 하나를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리우스 주의로 부터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까지,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은 가현설(Docetism)으로 부터 신정통주의 신학의 일각에 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주의’(...ism)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신적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긴 한데 어떤 초월적 신적 능력을 가진 자처럼! 풍향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며 미래의 일을 점치는 제갈공명을신인이라고 숭상했던 처럼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양성 교리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양성교리를 확실히 알고 양성이 조금의 부족함이 없이 온전하며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인 로마서 1 3,4절을 봅니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의 양성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자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서 권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공동번역)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먼저 살핍니다.

 

예수님은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분의 신성으로는 하나님이시며 성부(하나님)와의 관계로 말하자면 그분의 아들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과 더불어 하나의 초대교회 신앙 고백문인 로마서 10:9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사실 그를 사람들이 사람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복음서를 통해 보면서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이분은 정말 하나님 이시구나.’라고 있겠습니까인간의 지성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로다!’( 16:17)하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감동해 주셔야만 우리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도 그럽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도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줄기차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 31절에 결론을 줍니다. 마가복음에서도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4:41)라고 믿음의 고백을 유도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아래서 로마 백부장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15:39)라고 고백하지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있는 자는 받은 사람입니다. (도마의 고백. 20:29)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고 사유체계의 최우선에 두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치 않습니다. 계몽주의, 다윈이즘...이성주의,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이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인 것은 아니고 훌륭한 인간 스승이었다고 봅니다. 국민학교 책에 세계 4 성인으로 열거됩니다.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박애와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 불리우는 알버트 슈바이쳐가 그런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는 의사이며 독일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신학교수였습니다. 그의 Quest of Historical Jesus 19세기 까지의 신약 신학의 분수령을 이루는 대단한 업적이었는데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예수를 자신의 도덕적 mentor 삼을 지경이었지만 그를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이성의 범위에 드는 것만 취사선택하고 예수의 죽음과 죄의 용서와 기적등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행을 강조합니다. 사랑의 실천과 박애를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매우 속기 쉬운 함정입니다
 
한국동란 전후에 한국교회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보수신학과 갈등을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지성적 설교가 배척되고 주관적 체험과 기복주의로 흘러버린 그릇된 한국교회의 신앙 행태에 대해 자유주의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어떤 면은 옳으며 본받아야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면 그들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 1-3절을 보십시오. 골로새서 1 15절을 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도무지 하나님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유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려하다가 생긴 것이 무수한 종교요 철학들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계시하셔야만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 11,12절을 보세요. 3:16절을 생각해 보세요. 죄와 사망의 그늘에 있는 인간은 용서와 생명을 주실 하나님에게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고 만나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6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유일한 계시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지혜, 사랑, 공의, 능력, 거룩....모든 것에서 성부와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면 됩니다.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시고 어떤 것을 미워하시고 어떤 것을 슬퍼하시는가? 예수님께 물으시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일을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정복하고 죄의 권세를 깨뜨릴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가 만일 사람이기만 하셨다면, 그가 아무리 고결하게 살았고 선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희생하고 싶었어도 그의 죽음이 다른 죄인을 위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대속의 죽음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죄인의 죄를 능히 씻고도 남음이 있는 위대한 죽음입니다. (보혈의 권능이 너무나 크심) 그것은 그가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우리가 죄사람을 받은 풍성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크리스챤들과 항상 함께 계실수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인도하셔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풍성한 삶의 길로 이끄십니다. 오분 뒤의 일도 예측할 없는 불확실한, 그리고 사탄의 방해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를 보호하고 인도할 있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없는 인생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며 우리의 삶에 근원을 없는 평강과 사랑으로 채우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7:25)

 

우리가 신자로 살면서도 너무나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이 이르지 못하고 자주 죄에 빠지지만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3,3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안다고’ ‘믿는다 고백하는 것이 입술의 고백에 그치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참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그분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사랑과 두려움으로, 감사와 진지함으로, 사모함과 열망으로 무릎을 꿇어야 할것입니다. 빌립보 2장의 찬송시 처럼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그에 마땅한 경외심과 지극한 사랑과 존숭의 마음을 갖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성
실제로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라면 예수가이시면 되지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사람이셔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가진 적이 없습니까본문 로마서 1 3,4절을 다시 봅시다.

 

그의 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마태복음 11절에도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십니다. 성경에서 보충적인 동사를 가지고 성자를 묘사하는 곳을 봅시다. 이사야 9:9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역사의 시점에서 사람이것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4,5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릴리의 폭풍 속에서 배안에 계신 예수님은 피곤에 지쳐 잠이 드셨습니다. 얼마나 인간답습니까? 그런데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얼마나 신성의 위엄이 있습니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한순간나사로야 일어나라!’ 죽음을 깨뜨리시는 그분의 신성을 봅니다.( 11: )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하며 울부짖는 인간을 봅니다. 그런데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사시며 죽음을 정복하신 것은 신성의 위엄입니다. 그런데 양성 가운데서도 특히 인성이 중요합니까?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성육신’(사람의 몸을 입으심) 그를 죽을 있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만으로는 죽음을 느낄 없고 사람만으로는 죽음을 정복할 없으므로, 그래서 그는 양성을 취하십니다. 히브리서 10:4절을 보십시오. 성경의 중요한 진리중의 하나는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9:22)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17:11) 그래서 피흘림은, 생명을 대가로 치름은 사죄를 가져옵니다예수님은 피흘려 죽으려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사역은 전체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도 위대하시만 그것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 생명을 쏟아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가 몸으로 친히 당하신 모든 고난은 우리가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5)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이 죄로 인해 겪는 모든 고통을 체휼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우리가 예수님을 뛰어난 능력을 가진사람이나이신데 뭔가 모자라는 존재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히브리서 4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2: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는 태생 때로부터 천한 출생과 성장환경을 통해 비웃음과 조롱, 경멸을 경험합니다. 그의 빈한한 환경이 주는 수치심과 불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배척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신을 아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을 아십니다. 국가적 위기가 주는 두려움과 민족의 배도를 바라보는 아픔도 아십니다. 권력과 명예의 유혹에 노출된 바도 있었고 분노를 자아내는 목불인견도 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절박감과 절망, 채찍과 침뱉음의 수모, 십자가의 모진 고통....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과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인생의 고통을 같이 경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초자연적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때려도 아프고...그런 아닙니다우리와 같은 사람,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53:3)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인생에서 겪는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뇌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있는 분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시고 실패한 아담대신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인간이 실패하고 타락하고 죄에 빠짐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기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 아담과 같은 조건하에서, 아니 악조건 하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서 아담의 죄를 번복하여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광야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받으신 시험은 아담이 풍족한 에덴에서 받은 시험과 같은 맥락의 것입니다. 시험에서 순종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초월적 이점이 있었다면, 예를 들어 굶어도 배가 고프다든지... 했다면 그가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순종의 삶을 의롭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로마서 5 19,‘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같이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하신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transfer 주십니다.

 

그리고 순종은 또한 우리에게 모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우리가 되기를 원하셨던 바로 사람,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본으로 살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크리스챤들이 살아야 삶의 모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한 모본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글자 견본책으로 글자 쓰기를 익히듯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저렇게 착하게 사셨지...’라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야 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타락하여 멸망에 이른 우리를 구하시려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두 데리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분이 아들이 되시고 우리 모두가 그의 형제자매가 있도록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양성교리를 굳게 붙들라!
우리가 예수의 인성을 거론하면 괜히 불경스러운 같이 느낍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두드러지면 신격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집트나 로마나 헬라나....왕들은 부지불식간에 신격화되었습니다. 그를 보통사람으로 여기면 왠지 불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임을 믿지 않는 것은 불신앙의 죄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정통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소간의 docetism 영향이 있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결코 그를 폄하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성은 신성의 교리에서 보듯이 영원불변이며 무엇으로도 깍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온전한 인성은 신적인 구원의 은혜를 우리 삶의 실체속에 가져다 주는 신비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성육신이 가져다 주는 은혜의 탁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심! 이것보다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1:12-14)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이보다 충만하게 드러난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의 신비로운 진리에 대해서, 분의 은혜의 탁월성에 대해서 무감각하거나 시큰둥해서는 안됩니다. 그랜드 캐년의 웅장함, 밤하늘의 천체의 광대함,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리미드나 잉카족의 유적들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인간의 과학적 발전이나 위대한 예술작품앞에서 전율하고 숨을 죽일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보다, 우주보다 크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하시려, 나같이 악하고 추한 죄인,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원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말구유의 아기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님되심과 사람되심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우리는 마땅히 분을 찬양해야 할것입니다. 분의 사랑과 희생 앞에서,   겸손과 진리의 신비로움 앞에서 어찌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앞에서 경박한 말투과 빈정댐과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말씨를 사용할 있겠습니까? 어떻게 말씀을, 기도를 찬양을 하기 싫다든가 귀찮다든가 시간이 없다든가라는 말을 감히 꺼낼수있겠습니까?

 

만입이 내게 있으면 가지고 예수 주신 은총을 찬송하겠네..’라는 찬송들이 우리의 영원한 찬송제목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아멘

 

토론과 나눔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믿습니까
   관련된  성경구절을 들어 보십시오.
2.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 이심을 믿습니까?
3.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를 가집니까?
4.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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